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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결코 존재한 적 없는, 하지만 존재할 수도 있었을”
모더니티의 추론적 역사 다시 쓰기

“타틀린의 기념탑은 연극적 파편으로서, 종이 건축의 미완성 모델로서,
미래의 폐허를 닮은 유토피아적 비계로서 태어났다.”

상실된 기회들의 유령과도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이콘 타틀린의 기념탑을 경유한
근대성에 관한 “제3의 길”의 지성사

“제3인터내셔널에 바치는 기념비는 극단적인 반-기념비가 되어야만 했다. 건축 혁명의 선언문으로서 타틀린의 탑은 “부르주아적인” 에펠탑과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양자 모두에 도전했다. 철과 유리로 만들어진 그 탑은 회전하는 세 가지의 유리 몸체, 즉 정육면체와 피라미드 그리고 원기둥으로 구성되었다. 세계인민위원회가 자리할 정육면체는 일 년에 한 번, 제3인터내셔널 수뇌부와 행정위원회를 위한 피라미드는 한 달에 한 번, 정보 및 선전 본부가 될 원기둥은 매일 한 차례씩 회전하게 될 것이다. 라디오 전파가 탑을 하늘로 연장한다면, 3층에 자리한 타이포그래피 작업실은 그날의 모토를 구름을 향해 투사한다. 실제로 탑은 “혁명”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수많은 명시적?함축적 의미들을 구현하고 있었다.”(20)

이 책은 끝내 건설되지 못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이콘, 제3인터내셔널(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기념하기 위해 ‘모형’으로만 만들어진 바 있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전설적인 기념탑(1919~25년)의 형상을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에 투사해 보여주는 한 영화의 스틸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스베틀라나 보임은 이 신화적 건축물의 건축적·철학적인 변모 과정을 탐구해나가겠다고 말하며, 타틀린의 탑이 근대성에 관한 “제3의 길”의 지성사, 즉 자신의 대안적 계보학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대안적 계보학에 “오프모던”이라는 명칭을 붙인다.
“포스트” “네오” “아방” “트랜스” 같은, 전진하거나 너머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하면서도 결국엔 필사적으로 “안”에 머물러 있고자 골몰하는 온갖 포스트-비판의 접두어들 대신, 보임은 “빗겨나off” 서서, “무대 뒤편off-stage”에서, “엇박자로off-beat”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off”라는 단어를 택한다. 그러면서 진보의 직선로가 아니라 옆길이나 뒷길을 탐색하는 오프모던, 근대적 조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전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를 설명하기 위해 끝내 건설되지 못한 아방가르드 건축물 타틀린 탑을 소환한다. 왜 타틀린의 탑인가? 그보다도 왜 ‘건축’인가?
사유의 건립으로 표상되는 철학은 체계와 구조의 상징이라 할 건축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해왔으며, 건축적 은유는 서구 철학의 전 역사를 압도해온 수사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임이 건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는 그것이 “세계에 질감을 부여하는 포에시스의 형식”(10)이 될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임은 20세기의 직선적 내러티브를 농락하면서 “제3의 길”을 꿈꿔왔던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게오르크 짐멜,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저자들의 근대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 속에 건축적 형상이 스며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보임은 짐멜의 “모험의 현상학” 개념에 기대어 오프모던의 건축을 “모험의 건축”으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타틀린의 기념비는 “건설의 기술적 가능성이 아니라 […] 가능성의 건축이라 불릴 법한 새로운 차원을 여는 하나의 모델이자 기획”(66)을 대변한다.

모험의 건축과 오프모던
“이것을 폐허의 경관으로 간주할지 아니면
유토피아적 건설의 현장으로 간주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타틀린 탑은 처음부터 부동의 건물이 아닌 일종의 움직이는 기계로 설계되었다. 탑을 구성하는 내부의 세 몸체는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고, 이는 천체 궤도의 운행, 즉 반복과 회전을 가리키는 혁명의 어원적 의미를 구체화한 것이다. 기울어진 구조와 나선 형태(“최적의 마르크스-헤겔적 형태”)로 무한히 열린 상부는 건물의 몸체를 중력을 거슬러 대지로부터 밀어 올리는 역동적인 에너지를 낳는다. 타틀린 자신의 말에 따르자면 “순전한 예술적인 형식을 공리적인 목적들과 결합”시킨 결과물, 즉 창조자의 의도에 따르면 유용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기능하지 못하는 이 탑의 영구한 비완결성은 그것에 부여된 유토피아적 성격의 이면처럼 보인다. 타틀린의 슬로건인 ‘삶 속으로 들어간 예술’이나 ‘기술 속으로 들어간 예술’은 결코 “삶이나 기술을 위해 봉사하는 예술이나 정치적·사회적 혁명에 봉사하는 삶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이 건축의 미완성 모델로서, 미래의 폐허를 닮은 유토피아적 비계로서 태어났다.”(31)
타틀린의 기념탑은 또한 복원적 노스탤지어(상실된 대상의 초역사적인 재건을 시도하면서 집단적·민족적 성격을 띠는 정치적 통일체에 집착)와 성찰적 노스탤지어(상실의 근본적인 회복 불가능성과 아이러니적인 거리를 인정하면서 역사적 경험의 개인적 차원을 지향, 창조적 감정이 될 수 있다)라는 보임의 저명한 노스탤지어 유형학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읽을 수 있다. 전자가 제3인터내셔널의 꿈을 대체할 수 있는 궁극의 건물인 소비에트 궁전 건설 프로젝트로 이어졌다면, 후자는 종이 건축과 개념주의 설치라는, 20세기 중반 이후 소비에트 예술사의 독특한 흐름 속에서 끝없이 환기되어 재작동하는 불멸의 유령 같은 두번째 실존을 얻게 되었다.
보임은 콘스탄틴 보임에서 시작해 레오니드 소코프, 유리 아바쿠모프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폐허가 된 유토피아와 관계하면서 1920년대의 유토피아의 꿈을 기억하고 재활용하는 소비에트 비순응주의 예술이라는 일련의 개념적 시도를 따라가는데, 특히 올해 5월 말에 작고한 저명한 소비에트 출신 망명 예술가 일리야 카바코프의 “총체적 설치”는 오프모던을 대변하는 주역들 중 하나로 등장한다. 카바코프의 작업은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적 체계의 바탕에 놓인 이런저런 틈새와 절충, 당혹과 검은 구멍에 대한 신중한 환기가 된다. […] 카바코프는 근대 유토피아의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 두 가지 모순적인 인간적 충동을 드러낸다. 모종의 집단적인 동화 속에서 일상을 초월하려는 열망과, 기억을 보존한 채로 살아남음으로써 가장 살아가기 힘든 폐허 속에 거주하려는 열망.”(104~105) 미국의 큐레이터 로버트 스토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환상의 상실과 그것을 발명하려는 억제할 수 없는 욕구 사이의 긴장이며, 이는 20세기의 꽤 훌륭한 요약”이다. 카바코프는 망각/폐기 대 복원/건설이라는 이원적 선택지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내고자 한다. 보임은 이러한 오프모던의 시선이 인간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그리고 자연적 시간 사이의 양가적 관계와 부조화를 인정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유토피아적 프로젝트들을 변증법적인 폐허로서 프레이밍 할 수 있게 허용한다.”
보임은 책의 말미에서 ‘전문적 사유’와 체계성과 일관성의 요구가 아닌 경외감에 의해 인도되는 ‘열정적 사유’를 구분할 것을 제안했던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오프모던을 최종적으로 정의한다. “오프모던의 사유는 이론과 실천, 상상적 건축과 물리적 경험 사이의 이중적 운동에 관여하는 열정적 사유의 한 형식이다.”

스베틀라나 보임의 지적 여정

스베틀라나 보임은 2019년에 번역된 『공통의 장소』와 두 편의 글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지만, 그녀의 저작 전반을 아우르는 체계적인 소개는 여전히 미흡한 형편이다. 구소련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망명자-이방인 신분에 더해 소비에트의 해체로 고향을 영원히 상실한 경험을 통해, 어찌 보면 모든 것을 낯설게 볼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었던 보임은 상투적인 개념들에 새로운 조명을 비추어(그녀의 이름 스베틀라나는 ‘빛’이라는 뜻이다)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비상한 재능을 지닌 연구자였다. 특히 2001년도에 출간된 책 『노스탤지어의 미래』는 우리가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으며, 그녀의 이름을 영원히 ‘노스탤지어’ 개념과 연결시킨 바 있다. 한나 아렌트, 빅토르 시클롭스키, 게오르크 짐멜 등을 동원해 ‘자유’를 철학적 이념도 정치적 권리도 아닌 제3의 방식으로 이론화한 시도 역시 자유에 새로운 의미를 기입시키며 학문적·예술적으로 흥미로운 참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2015년 보임의 때 이른 사망으로 인해 오프모던을 둘러싼 말년의 작업들은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보임이 지금까지 탐색해온 주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개념은 우리 시대에 관한 새로운 사유와 해석과 연구를 자극할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책을 옮긴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김수환은 해제에서 우리 시대의 정초적 사상가 중 한 명인 보임의 위상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임의 학문 작업 전체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특히 오프모던 개념을 둘러싼 담론적 지형을 점검, 그녀의 지적 여정에서 이 기획이 차지하고 있는 각별한 의미를 보여준다. 또한 보임이 오프모던의 개념을 적용하며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있는 네 명의 인물과 관련해 이론적 배경 및 선행 연구들을 소개함으로써 책의 풍부한 독해에 도움을 준다.